내 인생 줄리엣 떠나보내며 상실감에 내내 울었다

입력 2023-10-05 18:32   수정 2023-10-06 01:59


친한 안무가들에게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냐고 묻는다. 많은 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꼭 해보고 싶다고 답한다. 음악도 아름답고 스토리도 매력적이라 그만큼 많은 안무가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인 게 분명하다. 1940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라브로브스키의 안무를 시작으로 수많은 안무가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탄생시켰고 (케네스 맥밀런, 존 크랭코, 루돌프 누레예프 등)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도 많아지고 있다. 그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모나코 몬테카를로 발레단의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만든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전의 것들과는 다르다. 새롭고 현대적인 안무, 단순화된 무대장치와 의상, 극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조명 효과와 영화 같은 연출력의 ‘드라마 같은 발레’다.

나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세 명의 천재적인 안무가(마요, 유리 그리고로비치, 루디 반 단지크)의 줄리엣을 연기했다. 그중 나의 첫 줄리엣과 마지막 줄리엣은 각각 2000년과 2013년에 연기한 마요의 줄리엣이다.

그의 줄리엣을 처음 비디오 영상으로 접했을 땐 그 매력을 알 수 없었다. 영국로열발레단 알렉산드라 페리의 줄리엣 영상을 보고 자라온 나에겐 170㎝ 넘는 장신의 ‘마요의 뮤즈’, 베르니스 코피에테르의 줄리엣은 무척 생소했다.


그녀의 춤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표현 방식은 내가 배운 클래식 발레 마임과는 다른 다소 충격적인 것이었다. 미니멀한 무대 세트는 나에겐 너무 현대적이었다. 2000년 국립발레단 초연 당시 몬테카를로 발레단 조안무가인 ‘지오반나’와 작품 연습에 들어가며 진정한 작품의 매력을 알게 됐다. 매일 밤 비디오영상을 보며 코피에테르의 몸짓과 사랑에 빠져 그의 춤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발레 무용수로서 모든 게 새로웠다. 발끝이 아니라 일상생활하듯 뒤꿈치를 디디며 무대에서 걸어보는 일, 사랑에 빠진 연인 간의 장난, 다툼과 키스…. 이런 감정들을 발레 마임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배우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춤으로 표현해야 했다. 모든 감정을 춤으로 말해야 했는데, 20세 초반이었던 나는 감정 표현이 서투른 데다 클래식발레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온 터라 익숙하지 않았다. 20세의 줄리엣은 미완성인, 아직은 그저 ‘모방의 줄리엣’이었다.

그 후 그리고로비치, 단지크의 작품으로 새로운 줄리엣 경험을 쌓았고 2011년 국립발레단에서 다시 마요의 줄리엣을 만났다. 5일간의 짧은 일정은 마치 진짜 로미오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를 줄리엣으로 살게 했다. 당시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넓은 바다에서 수영하듯 마음껏 자유롭게 춤을 출 수 있었다. 프로코피예프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 만큼 서곡만 들어도 눈물이 났다. 음악이 시작되면 곧장 작품의 기승전결이 드라마틱하게 연결돼 춤을 출수록 희열을 느꼈다.

마요의 작품은 손끝에서 발끝까지 가득 채운 감정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풀어놓는 과정이었다. 그런 부분을 이해하게 되자 걱정도 됐다. ‘섬세한 감정들이 공연장에서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나의 감정을 믿고 진실하게 표현하자 관객들이 나와 함께 줄리엣의 행복, 슬픔, 절망을 모두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0대의 줄리엣은 20대의 나와는 또 다른 인생 경험을 갖고 있었고, 그런 감정과 몸의 표정을 춤으로 풀어내는 데 더욱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마지막 줄리엣은 2013년 국립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었다. 5일간의 공연 내내 무대에 섰는데 돌아보면 그땐 ‘그 누구의 모방도 아닌, 계산에 의한 연기도 아닌’, 그저 김지영의 줄리엣으로 춤을 출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1주일 동안 매일 밤 줄리엣 꿈을 꿨다. 줄리엣으로 보냈던 행복한 꿈에서 깼을 때 내가 더 이상 무대 위의 줄리엣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상실감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가슴 아픈 사랑앓이를 하고 나서야 나는 나의 줄리엣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마요의 줄리엣은 나에게 영원한 첫사랑이다.

발레리나·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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